예술영화의 메카로 인식되는 프랑스는 장 뤽 고다르, 프랑소와 트뤼포, 알렝 레네만 세계에 알려진 게 아니다. 에디트 피아프, 조르지오 무스타키, 세르주 갱스부르, 제인 버킨 등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뮤지션들도 많다. 더 멀리 가보면 스탕달,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등에서부터 장 폴 사르트르, 앙드레 지드, 알베르 카뮈 등으로 이어지는 소설가들, 샤를 보들레르, 아르튀르 랭보, 폴 엘뤼아르 등 시인들, 몰리에르, 사뮈엘 베케트, 장 주네 등 희곡작가들이 겹겹이 쌓여있다. 이들이 통째로 세계시장에서 버무려져 ‘프랑스 문화예술’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물론 프랑스가 그 대표적 사례인 것도 아니다. 미국도 일본도 이탈리아도 독일도 모두 마찬가지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의 한 장르를 소비하기 시작하면 다른 장르도 동시에 따라가게 된다. 한 장르가 호응을 얻기 시작하면 이것이 문화적 신뢰도의 밑바탕이 돼 다른 장르도 끌어올려주기 때문이다. 예컨대 1990년대 중반 무라카미 하루키를 필두로 인 국내 일본문학 붐의 바탕에는 1980년대 초반부터 일기 시작한 해적판 일본만화 붐, 1980~90년대를 관통한 해적판 일본 아이돌 음악 붐, 더 깊이 들어가면 엔카와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 트로트 음악 베이스가 깔려 있는 식이다.
결국 문화 전파란 개개 히트상품의 나열이 아닌, 해당 국가 문화 전체에 대한 신뢰도 확충에 가깝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특수한 사회문화적 요인과 문화상품 수요공급의 희비쌍곡선이 놓여있게 마련이다.
한국을 돌아보자. 위 언급한 문화 전파 특성은 최근 일본 내 한국 여성 아이돌그룹 붐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액면 그대로만 보면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상황이다. 갑자기 일본 10~20대 여성층이 한국 여성 아이돌을 동경하고 열광을 보내고 있다. 과열된 분위기 탓에 한일 양국에서 급작스레 갖가지 분석이 난무하고 있지만, 오류도 그만큼 많다. 그러한 이상열기를 ‘여성 아이돌그룹’이라는 상품 내에서만 해석하다보니 생긴 오류들이다. 이 같은 오류를 일정부분이나마 해소시켜 준 것이 바로 일본 아사히신문사 계열 매체들이다. 사실상 ‘2차 한류 붐’에 가장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는 종합미디어그룹이다.
아사히신문사 계열 시사주간지 ‘아에라’는 지난 5월3일호에서 한국 드라마 2차 열풍에 대한 분석 기사를 내보냈다. 이를 중계보도한 제이피뉴스 4월29일자 ‘日 ‘한국 드라마 열풍’ 이유 있다!’는 “TV도쿄와 BS재팬에서 한국 드라마 편성을 담당하고 있는 타다씨의 말에 의하면 한국 드라마는 젊은층까지 그 폭이 넓어지고 있다. 대학 1학년인 다카기 이즈미(19)씨는 그 중 한 명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한국 아이돌그룹 ‘슈퍼 주니어’의 팬이 된 이후부터 한국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해 드라마도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주위에 아무리 열심히 ‘한국 드라마’의 장점을 설명해도 반응은 차가웠다”면서 “그러나 동방신기 인기가 불붙기 시작한 이후부터 차가웠던 주변 친구들도 서서히 그녀의 의견에 동감을 표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주위 분위기가 갑자기 급변한 것이 올해 3월, 학교 봄방학 기간 동안 후지TV에서 ‘찬란한 유산’이 방송되고 나서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면서 “주위 친한 여자애들은 전부 보고 있었어요. 이후 한류에 대해서 이런저런 질문을 받는 입장이 됐습니다. 그 아이들은 이 드라마로 완전히 한국 드라마에 대한 편견이 깨진 듯이 보였어요. 현재 ‘찬란한 유산’의 뒤를 이어 방송되고 있는 ‘뉴 하트’를 보고 있는 애들도 많습니다”라는 다카기씨의 코멘트도 함께 전했다.
결국 SBS ‘찬란한 유산’이 일본 10~20대 여성층에 있어 ‘제2의 겨울연가’가 됐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 같은 결론은 기사 속 다카기씨 혼자만의 경험에 의해 추론된 것은 아니다. 기사에 등장하는 후지TV 편성부의 야기씨는 “‘찬란한 유산’이 방송된 오후 2시는 방송을 보는 시청자가 고정되어 있는 시간대입니다. 시청률도 거의 변동이 없죠. 그러나 지난해에 평균 3.9%였던 시청률이 ‘찬란한 유산’이 방송될 땐 6.6%로 뛰어올랐습니다. 최고 시청률이 9.7%까지 치솟기도 했지요. 이런 기록은 10년 동안 없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수치적으로 결론이 나온 상황이라는 것이다. 후지TV는 이후 여름방학에 맞춰 ‘여름 축제’라는 제목으로 ‘궁’, ‘미남이시네요’, ‘커피프린스 1호점’ 등을 매일 3시간에 걸쳐 방송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일본 TBS에서 야심차게 프라임타임에 방영했지만 좀처럼 반응을 얻지 못한 ‘아이리스’의 고전은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1, 2차 한류 드라마 붐의 핵인 ‘겨울연가’와 ‘찬란한 유산’의 차이를 보면 쉽다. 둘 다 한국의 전형적인 트렌디 드라마이며 열정적인 연애담과 엄격한 가족주의를 담고 있다. 다른 점은 사실상 하나다. 등장인물들의 연령대다.
‘겨울연가’가 국내 첫 방영됐을 당시 주인공 배용준이 우리나이 31세, 최지우가 28세였다. 전반적으로 20대 후반~30대 초반 사이 사회인들의 러브스토리였다. 그러나 ‘찬란한 유산’은 다르다. 방영 당시 이승기와 한효주가 모두 우리나이 23세였다. 대학생~사회초년병 나이대의 러브스토리였던 셈이다. 결국 같은 트렌디 드라마라는 맥락 하에서 등장인물들의 연령대만 낮췄더니 세대적 동질감을 사 10~20대 여성층에 먹혔다는 결론이 나온다. 10~20대 여성층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도 중장년 여성층과 같이 트렌디 드라마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방증도 된다.
반면 ‘아이리스’는 일단 트렌디 드라마 라인에서 벗어난 장르 드라마였고, 방영 당시 이병헌이 우리나이 40세, 김태희가 30세였다. 기존 중장년 여성층이 선호하는 등장인물 나이대임에도 장르는 그들이 즐기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니 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 따라서 ‘아이리스’의 실패로 ‘드라마 한류는 더 이상 안 된다’고 판단 내려선 안 되며, 오히려 ‘찬란한 유산’으로 시작된 ‘또 다른 한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더 중요한 것은 소리 소문 없이 진행되던 2차 한국 드라마 열풍이 위 언급한 문화 전파 특성에 정확히 들어맞는다는 점이다. 한국 여성 아이돌그룹만 대박을 내는 상황은 불가능하며, 이를 가능케 한 문화 환경이 드라마 등 여타 장르를 통해 이미 마련돼 있었다는 것.
결국 이런 식의 구도가 나온다. 먼저 청년층 타깃이었던 동방신기의 선전으로 일본 10~20대 여성층 내에서 한국 아이돌 산업 전반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런 흐름이 빅뱅의 성공적인 시장 안착까지 도왔다. 여기까지 이르자 한국 대중문화상품에 대한 이질감과 불신도 어느 정도 깨졌다. 이어 등장인물 연령대를 낮추고 10~20대 여성층이 좋아할 만한 러브라인 콘셉트로 ‘찬란한 유산’이 등장하자 곧바로 반응이 왔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 대중문화상품에 대한 신뢰도가 급격히 높아진 상황에, 일본 내 자체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여성이 동경할 만한 여성’ 콘셉트의 한국 여성 아이돌그룹이 본격적으로 진출을 선언하자 시장이 폭발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자면, 문화 소비 대물림 현상도 어느 정도 지목할 수 있다. 지금 한국 대중문화 상품을 열정적으로 소비하는 10~20대 여성층은 6~7년 전 10대 초반~중반이었다. 사춘기에 막 들어서던 시점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그들의 ‘어머니’는 ‘겨울연가’를 중심으로 한 한류에 푹 빠져있었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 가정 내에서 이미 한국 대중문화에 친숙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것. 더군다나 모녀지간은 사회문화적 유대감이 여러 측면에서 부자, 부녀 또는 모자지간보다 강하다. 이런 식으로 심리적 저항감이 이미 무너진 상황이기에 동방신기가, ‘찬란한 유산’이, 소녀시대가 연이어 다가설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어머니’를 위시로 한 가정의 영향은 그 자녀들에게 한국 대중문화상품이 낯설고 후진적인 것이라는 편견은 깨줄 수 있을지언정 적극적으로 소비하게끔 이끌지는 못한다. 또한 한국 아이돌그룹에 대한 호의적 인식이 불과 1~2년 안에 드라마 장르까지 번져나간다는 것도 선뜻 이해는 가지 않는다. 한국 드라마에 남다른 매력이 있고, 그것이 일본 10~20대 여성층이 요구에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었기에 전이현상이 나왔으리라는 것이다. 본래 문화 전파의 ‘떼거지’ 특성도 한 장르 상품이 내포하고 있는 독보적인 문화적 특성이 여타 장르에도 유사하게 녹아들어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드라마가 일본 10~20대 여성층에 어필할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일까.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이 그들의 어머니 세대와 같은 인식과 환경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흔히 ‘겨울연가’로 비롯된 1차 한류 붐은 일본 중장년 여성층이 ‘잃어버린 10년’ 동안 양산된 ‘고개 숙인 남자’들에 실망감을 느낀 나머지 그에 따른 스트레스를 격정적인 한국 드라마를 통해 해소하면서 비롯됐다고 분석되고 있다. 남성이 고개를 숙이면서 반대급부로 여성이 고개를 들고, 보다 열렬하고 격렬한 남성적 문화 취향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현재 10~20대 여성층도 이미 똑같은 현상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다. 장기화된 경제 불황 탓에 일본 청년 남성층은 이른바 초식남(草食男)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내성적이고 자기보호 심리가 강하며 수동적인 일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당연히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10~20대 여성층은 육식녀(肉食女)화 돼갔다. 보다 거칠고 자극적이며 격렬한 대중문화 콘텐츠를 즐기기 시작했다. 자살, 강간, 마약 등 극단적인 상황들이 연발되는 휴대폰 순애소설들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대개 한국으로 따지면 ‘막장 드라마’들이다. 그리고 이를 영화화한 ‘연공-코이조라’와 ‘내 첫사랑을 너에게 바친다’ 등도 마찬가지로 대히트를 거뒀다.
이런 바탕이 깔려 있었기에 격정적 TV드라마의 ‘본류’인 한국 드라마가 동세대 등장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등장하자 바로 폭발하고, 소극적인 남성 취향에 맞춰져 동세대적 요구를 들어주지 못했던 여성 아이돌그룹 시장에 자신의 성적매력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격렬한 비트와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한국 여성 아이돌그룹이 등장하자 똑같이 폭발했다는 것이다. 문화 전파가 마치 시한폭탄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장르에 걸쳐 터질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이제 생각해봐야 할 부분은 좀 더 깊은 차원이 된다. 단순히 콘셉트 탓에 일어난 열풍이라면, 그런 것은 일본도 얼마든지 카피할 수 있다. 한국 드라마 1차 붐 당시 충격을 받은 일본 방송시장이 1970년대의 대표적인 막장 드라마 TBS ‘붉은 시리즈’를 리메이크해 시장 탈환에 나섰던 것이 좋은 예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 여성 아이돌그룹 붐은 단순히 카피하고자 한다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다. 일본 대중음악시장 주류를 훌쩍 뛰어넘는 퀄리티로 승부하고 있기에, 일본이 대중음악산업 풍토를 완전히 개선하지 않는 한 상당기간 동안 경쟁력을 지닐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막 불 붙기 시작한 TV드라마 쪽은? 지난 8월16일자 아사히신문 보도를 옮긴 제이피뉴스 기사 ‘日 한류, K-Pop 타고 3차 붐 도래하나’를 보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기사는 “후지TV ‘한류 알파’ 코너를 만든 편성 마케팅 부장은 아사히의 취재에 한류 드라마의 인기에 대해 우선 ‘구성의 탁월함’을 들었다. 그는 한국 드라마가 스토리가 긴 만큼, 다양한 굴곡을 그려내고 있고, 주연 이외의 조연들도 제대로 그려진다는 게 특징이라고 설명했다”면서 “그는 한국 드라마가 “대사도 인상적이고, 인생의 교훈이 많이 담겨 있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일본어로 들으면 어색한 말도 자막이라면 몰입하기 쉽다”라고 강조했다”고 전하고 있다.
사실상 한국 드라마와 일본 드라마를 퀄리티 차원에서 비교하기란 어렵다. 적어도 일본 아이돌 음악과 한국 아이돌 음악만큼 퀄리티 차이가 난다고 보기엔 어렵다. 그러나 그럼에도 큰 차이를 둘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바로 편성이다. 일본 드라마는 3개월 단위 분기별로 진행되며 주1회 방영을 기본으로 하는 탓에 대개 9~13화 사이에 끝난다. 호흡이 짧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분기 개념 자체가 없으며, 짧은 트렌디 드라마라 할지라도 24화 이상으로 일본에 비해 배 이상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이것이 일본 방송시장이 기존 체제를 완전히 뒤엎지 않는 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차이가 된다. 그리고 여기에 길들여진 일본 시청자층에 있어 한국 드라마는 꾸준히 경쟁력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사에서도 언급됐듯 ‘자막’이 주는 프리미엄도 따로 누려볼 만한 것이다.
결국 아이돌을 중심으로 한 한국 대중음악도, TV드라마도 모두 ‘지속 가능한’ 시장을 일본에서 마련할 수 있게 됐다는 이야기다. 실수 없이, 지난 1차 한류 붐 때처럼 도떼기 장사로 망쳐버리지만 않으면 승산이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영화와 TV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다. 아이돌그룹 열풍 탓에 국내 아이돌이 대거 출연하는 TV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은 벌써 반응이 오고 있다. 위성방송 스카파가 지난 8월 주최한 한국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이벤트는 당일에 티켓이 모두 매진됐으며, 입장객의 70%가 10~20대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를 바탕으로 여타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도 소개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고비가 바로 영화다. 지난주 일본서 ‘쓰나미’라는 제목으로 개봉된 한국영화 ‘해운대’는 주간 흥행 10위에 턱걸이했다. 지난해 1000만 이상 관객을 동원했던 국내 대히트작치곤 상당부분 미약한 결과다. 아직 한국 대중문화상품 열기가 영화까진 번지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제 고민해봐야 할 것은, 과연 한국영화가 지닌 독보성은 무엇이며, 어느 시장을 보고 어떤 종류의 영화를 어떤 방식으로 안착시키느냐다.
문화 전파는 떼로 다닌다. 당연한 현상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떼로 다니지 않으면’ 모든 기반이 한꺼번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1차 한국 드라마 열풍이 여타 장르의 뒷받침 없이 기반을 만들지 못해 결국 ‘욘사마 붐’에서 그쳤듯이 말이다. 발견된 시장을 더욱 고조시키고, 안정화시키며, 동시에 발붙이지 못한 장르 시장을 돌아봐야 할 때다.
미국 영화를 보고 미국 드라마를 보고 미국 음악을 듣는 것이 당연했던 1980년대처럼, 그리고 홍콩 영화를 보고 홍콩 음악을 듣고 홍콩 드라마마저도 비디오대여점에서 줄기차게 빌려보던 1990년대처럼, 한국도 타국에, 그것도 아시아 최대 규모 시장에, 전방위적 문화 전파를 이룰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되고 있다. 이 기회를 절대 놓쳐선 안 된다.
대중문화평론가 fletch@empas.com
Via 뉴스
XOXO